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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공부 기록

열한 계단 by 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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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첫 페이지에 나온 말이다. 그동안 나는 내 삶을 표류해 오지 않았나 자문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내 인생을 방향도 제대로 모른 채 표류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덮고 생각한다. 이제는 항해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책에 조금이라도 집중 할 수 있었던 1년 반 동안 수많은 일을 겪고 느끼고 배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럴 수 있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좁은 동굴 속에서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더 넓고 깊은 세상 속으로 다가가야 할 때가 되었다. 

 

2021년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2022년을 항해 하기를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을 간직한다. 

 

 

 

p.40

멍청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은 없다. 다만 학생을 멍청하고 공부 못하는 존재로 평가하는 어른들의 시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p.41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놀랍도록 심오하다. 반면에 현행 교과는 그들이 바보가 되기를 원한다. 단순 암기와 기계적인 문제 해결능력만을 강조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넘어가면 학생들은 질문을 멈춘다. 그들은 실제 교과의 내용보다는 질문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른들에게 더 많이 배운다. 

 

p.42

나의 삶에 대한 존재론적 가치가 부여되어야 이들은 비로서 움직인다.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해내기 위해 공부하고 있음을 학생 스스로가 이해해야 한다. 

 

p.95

이러한 우월감과 선민의식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사실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배움의 부족으로 세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찌 않거나, 경제적인 자립을 하지 못하고 그 방법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현실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여 타협과 조율에 익숙하지 않을수록 세상과 벽을 쌓고 작은 세계 안에서 완전함을 향유하려 한다. 

 

p.102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107

우리는 의심해야한다. 왜 그들이 지금 내 앞에서 신에 대한 순종을 말하는지, 왜 국가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지, 왜 나에게 겸손하고 절제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지. 그러한 강요를 통해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의심의 눈으로 직시해야한다. 

 

p.120-121

무상과 무아는 세계의 엄밀한 진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세계와 자아에 집착하게 되고 여기서 고통이 생겨난다. 변화하는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움켜쥐려하는 것처럼 슬픔을 낳는다. 

"자신이 자신의 등불이 되어라.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처로 삶아라."

 

p.152

'너는 해야한다'와 '나는 원한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의무라면, 뒤에 것은 권리다. 노예에게 주어진 의무와 주인에게 주어진 권리. 정신이 사자가 된다는 것은 종속적인 노예가 주체적인 주인으로 일어서려는 저항을 의미한다.

 

p.168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분명하게 기억해야한다. 당신은 노동자로 살기 위해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p.265

왜 노동자의 임금은 그들이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제공하는가? 공산주의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해서 자신의 몸의 팔아 생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부를 획득함에도 불구하고 현살에서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가 생산한 모든 생산물을 자신이 우선적으로 소유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노동자로서 기능할 수있는 최소한의 정도에서만 대가를 지불한다. 임금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나의 월급이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월급은 내가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제공된 것이다. 

이 대립 구도를 기억해야 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이것이 근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본질적이 구조이다. 이러한 대결 속에서 국가, 법, 정치, 질서가 세워지고 부르주아의 이익이 지속적으로 관철된다. 

 

p.386-387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내 시야의 경계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자기 시야의 경계를 한번 보십시오, 경계가 보이시나요? 아무리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내 시야의 한계를 볼 수 없으며 그것이 전혀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도 자기 뒤통수를 볼 수 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답답해하지 않죠. 우리가 시야의 경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의 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까지를 이해하는지 그 경계가 보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자신의 제한된 이해만으로도 만족스럽게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p.388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대해 앞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어화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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